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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도 전투의 전주곡, 서주 전투
한헌제가 허리띠에 비밀 조서를 숨겨 조조를 제거하라고 명령한 일이 알려진 뒤, 조조는 이일에 가담한 유비를 치기로 결정한다. 유비는 조조를 막기 어렵다고 여겨 손건을 보내 하북의 원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원소는 자기가 사랑하는 막내아들이 병에 걸렸다면 출병을 거절한다. 결국, 유비는 조조에게 참패하여 서주를 잃고 가족과도 헤어져야 했다. 유비와 의형제를 맺은 관우는 조조에게 투항하고, 유비는 업성으로 도망가 원소에게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서주 전투는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관도 전투의 연습 경기인 셈이었다. 조조가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정세를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특히 원소의 속마음을 잘 꿰뚫어 보았다.
<손자병법>은 이렇게 이른다. 전투 지휘자는 적군과 아군 양쪽을 여러 각도에서 비교하고 상세히 알아야 하는데, 그래야 전투의 승패를 예측할 수 있다. 또한, 전투를 벌일 때는 속전속결로 이겨야 한다. 전투가 길어지면 병사들이 피로해지고 좌절하여 사기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조조는 서주를 공격하기 전에 가장 큰 장애가 될 원소에 대해 자세히 분석했고, 그가 군대를 파견하지 못할 것을 알고 군사를 일으켰다.
반면에 유비는 서주 지역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군대가 약하고 장수도 부족했다. 또 서주는 비좁은 평원 지대라서 성을 지키기에 유리한 지형이 아니었다. 이때 원소마저 도움을 거절했으니 유비는 뚜렷한 약세에 놓였다.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 역시 유비에게 불리했다. 자기 근거지에서 전투를 벌이면 지키기는 쉽지만 싸우기에는 불리했다. 그런데 유비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조조군이 서주성 경계에 들어오자 적은 군사를 끌고 나가 조조를 기습한 것이다. 결국, 유비는 크게 패하고 성을 잃는다.
이 전투에서 제3세력인 원소는 아들이 옴에 걸린 것을 이유로 유비를 도우러 군대를 보내지도 않고, 비어 있는 허도를 기습하지도 않았다. 원소가 조조를 기습할 기회를 놓치자, 조조는 손쉽게 유비를 공격할 수 있었다.
조조는 서주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훗날의 걱정거리가 될 유비에게 타격을 입히고, 군사들의 사기를 크게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중원 지역의 요충지인 서주를 차지하여 원소를 공격할 기반을 마련했다.
2. 원소의 침착함
모든 사람은 성격의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는 평소 잘 보이지 않던 성격 특성이 표출될 수도 있다. 원소 역시 이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떤 때는 어리석었지만 또 어떤 때는 침착하고 냉정했다.
<후한서>를 보면 초평4년(193년) 원소와 공손찬은 두 번의 큰 싸움 이후 잠시 화해했다. 청주를 얻은 원소는 즐거운 마음에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큰 연회를 열었다. 한창 연회가 무르익었을 무렵 보고가 들어왔다. 위군에 주둔해 있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흑산적 두목 우독 등과 함께 원소의 근거지인 업성을 점령하고 성의 군수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업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그곳에 가족을 둔 사람들이 모두 놀라 울먹이는데, 원소만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계속 술을 권했다.
원소 역시 마음이 급했지만, 군사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동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 흑산적 무리 중에 꽤 높은 지위에 있는 자로, 스스로 ‘평한장군’이라고 부르는 요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요숭은 오랫동안 원소를 존경한 데다 흑산적 무리로 사는 것이 미래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요숭은 몰래 원소와 업성 귀족들의 가족과 친척을 빼돌려 척구로 피신시켰다.
원소는 척구에 와서 자신의 가족과 업성 귀족들이 무사한 것을 보고 요숭에게 큰 상을 내리고 건의중랑장으로 삼았다. 가족에 대한 걱정을 던 원소는 곧장 손을 쓰기 시작해, 닷새 만에 우독의 항복을 받아 내고 산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여 흑산적을 몰아냈다.
3. 바람에 날리는 ‘아기(牙旗)’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소패로 가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 ‘아기’가 부러진다. 조조는 모사들을 불러 모아 점을 쳐 길흉을 알아본다.
‘아기’는 어떤 모양의 깃발일까? ‘아기’라는 이름은 한나라 때 시작되었는데, 깃발의 꼭대기를 코끼리 이빨로 장식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아기’의 ‘아’는 ‘어금니 아’ 자다). ‘아기’는 군대 통솔자를 상징하는 ‘장군기’ 구실을 했다. 그래서 다른 군기보다 크고 높게 걸어 위엄을 표시했다.
삼국시대에는 ‘장군기’ 말고도 ‘아기’가 또 있었다. 방향에 따라 다른 색을 사용한 오색 ‘아기’는 각기 다른 군사 조직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다. 똑같이 ‘아기’라는 이름을 사용해도 ‘장군기’로 쓰이는 ‘아기’는 확실히 구분되었다. ‘장군기’인 ‘아기’는 보통 다른 군기와 함께 사용하지 않으며 지휘관의 자리에 항상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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